암살하려 했던 북한의 특수부대 1월 21일 대통령을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625전쟁이 시작됩니다

3년이 지난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은 휴전 상태로 한동안 지속되고 있습니다

한국전쟁 휴전 이후 북한은 끊임없이 남한을 견제하고 도발적인 적화통일을 위한 야망을 보여 왔습니다

이는 1968년 1월 21일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정규 부대에 속하지 않고 게릴라 중심의 전투를 수행하는 비정규군을 빨치산이라고 합니다.

1965년 한국과 일본 간에 맺어진 동맹조약인 한일기본조약으로 한미일 동맹체제가 완성되자 북한은 초조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당시 북한의 국가원수였던 김일성은 항일 빨치산 전술에 의거하여

우리나라에 투입될 빨치산을 키우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1967년 4월에 제1 24군 부대가 탄생하게 됩니다.

“제124군부대는 엄선된 정예병 2400명으로 구성되어 300명씩 분산 훈련을 받았으며, 적의 배치상황 이론, 지뢰극복을 위한 정찰병 기본동작지형학, 사격, 침투훈련 같은 것을 교육받았다고 합니다”

이들은 모두 8개의 기지로 나뉘어 제6기지에서 서울, 경기도 지역 침투를 담당하였습니다.

1968년 1월 2일 북한의 국방성에 해당하는 민족보위성에서 1월 21일 남침하라는 작전 지시가 내려옵니다

“제6기지는 모두 다섯 개 조로 나뉘어 청와대, 미 대사관, 육군 본부, 서울 형무소, 서빙고 간첩 수용소를 습격하려 했습니다”

당초 25명이 한국에 침투했다가 1968년 1월 13일 한 가지 목표에 집중하는 게 낫다고 판단해 31명이 5개조로 나뉘어 청와대를 습격하게 됐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암살해 한국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기관단총, 권총, 대전차용 수류탄, 방어용 수류탄, 단도를 갖춘 채 1968년 1월 17일 한국전쟁 이후 그어졌던 휴전선(정전선)을 넘어 작전을 개시했습니다”

“1월 18일 새벽 임진강 쪽에서 하룻밤을 자고, 1월 19일 새벽에는 파평산에서 다시 하룻밤을 자고, 1월 19일 낮에 서울에 오기 위해 경기도 파주에 있는 산을 넘다가 그곳에 있던 나무꾼 4형제를 만나게 됩니다”

이들은 나무꾼 형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무선으로 북한에 물어봤지만 회신된 암호를 풀지 못해 나무꾼 형제를 도와 다시 청와대로 향했다.

“1월 20일, 나무꾼의 통보를 받은 한국군은 파평산을 포위하였으나, 이들은 이미 빠져나온 뒤이고, 앵무봉을 거쳐 비봉에 도착한 후 1월 21일에는 서울시내로 들어옵니다.

그들이 처음 검문을 받은 곳은 서울 종로구에 있는 자하문 초소입니다.
이곳에서 검문을 받을 때 자신들이 방첩대원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방첩이란 기밀이나 보안을 유지하기 위한 활동이고 방첩대원이라고 하면 기무사정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검문 도중 수상한 경찰이 무전을 하고 당시 종로경찰서장이던 최규식 총경과 경찰 병력이 출동해 북한군과 경찰의 대치가 시작됩니다.

멀리서 서울 시내버스가 길을 따라 올라오던 중 북한군은 이것이 한국군이 탄 버스인 줄 알고 총을 난사해 수류탄을 던지고 선제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민간인까지 공격해 자하문 초소 전투 과정에서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 제1사단 제15연대장 이익수 대령과 국군 장병과 민간인 30여 명이 사망했습니다.

북한에서 귀순한 31명의 공산군 병사 중 28명은 사살됐고 2명은 북한으로 도망간 것으로 추정되며 나머지 1명은 투항했다가 투항한 사람의 이름은 김신조입니다

김신조는 1월 22일 새벽 체포됐는데 나오면 도와주겠다는 말에 투항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체포된 후 김신조는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나머지 공산주의자 소탕에 적극 협력했으며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임무가 박정희의 목을 베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 사건은 1월 21일에 일어났으므로 1.21사태라고 불리기도 하고, 살아남은 김신조의 이름을 따서 김신조 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베트남에서는 같은 시기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에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미국이 남베트남을 지원했기 때문에 북베트남의 호찌민은 북한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한국, 미국, 일본이 궁금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파병을 쉽게 보낼 수 없어 간접적으로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사실 김신조 사건의 목적은 박정희를 암살하는 것이었으므로 결과적으로 임무 실패라고 할 수 있지만

김신조 사건으로 내부 경계가 더욱 필요하게 되어 남베트남에 파병할 수 없어 약속대로 간접적으로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월남전에서 북베트남이 이기게 된 것은 김신조 사건 절반의 성공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김신조 사건 이후 한국은 북한에 사과를 받고 싶었지만 그렇지 않았고 또 이런 상황이 벌어질 것을 우려해 준비를 하게 됐습니다.

먼저 간첩을 구별하기 위해 전국민이 주민등록번호를 사용합니다.
참고로 박정희의 주민등록번호는 110101-100001이고 박정희의 아내인 육영수는 110101-2002였습니다

그리고 이 게릴라 전투에 대비하기 위해 예비군과 5분 대기조, 육군 3사관학교가 창설됩니다.

이번 사건을 복수하기 위해 김일성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미는데, 이른바 ‘실미도’라고 불리는 684부대가 만들어집니다.

군대 복무기간이 연장되고, 이로 인해 당시 현역이었던 병사들의 제대일도 연기되었습니다 육군과 해병대는 6개월마다 해군과 공군의 비율이 3개월씩 상승했다고 합니다.

살아남은 김신조는 망명해 한국 국적을 취득했고 김재현으로 개명해 목사로 일했으나 현재는 은퇴했다고 합니다

또 김신조 일행이 산에서 나무꾼 형제를 만났을 때 회신된 암호를 풀지 못했다고 했는데, 그 후 이 암호를 풀었으면 복귀하라는 명령이었다고 해요.